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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서울 은평] 진관사와 백초월길

by 렛고잉 2022.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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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들머리길에는 백초월스님의 뜻을 기리기 위한 ‘백초월길’이 조성되어 있다. ‘태극기 비’에서 진관사까지 약 1km 정도의 짧은 길이지만 ‘누군가는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목숨을 내놓고 다닌’ 길이었을 것이다.

 

백초월길을 따라 일주문, 극락교, 해탈문을 차례로 지나면 진관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무리지어 있는 오래된 소나무들과 북한산 봉우리들이 절집을 호위하듯 둘러싼 모습은 가히 일품이다. 대웅전을 턱 받치고 서 있는 응봉과 크고작은 기암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감전이라도 될 것만 같다.

 

 

진관사는 고려 현종 2년(1011년)에 건립된 유서깊은 천년고찰이다. 현종(1009~1031)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진관스님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한다. 현종의 명을 받은 당대 최고의 풍수대가들이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최고의 길지에 진관사를 세웠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고려가 멸망한 후에도 진관사의 위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조선시대에도 범국민적인 국가행사로 ‘수륙재’를 봉행하였고, 세종 때에는 한글창제를 위한 독서당과 비밀연구소가 있었다. 진관사 수륙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비밀거점으로 활용되는 등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칠성각에서 태극기와 신문자료들이 발견됨으로써 진관사의 위상이 확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태극기의 주인 초월스님(속명 백인영)은 1878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13살에 지리산 영원사에서 출가하였다. 초월스님은 독립군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전달하고 불교중앙학림(동국대 전신)에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담당하고 ‘혁신공보’발간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주로 하였다.

 

20대 중반에 불교중앙학림의 강사로 내정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으며, 만해가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갈 후보로 생각할 정도로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 진관사 태극기가 발견된 칠성각

 

 

 

​1938년 봉천행 화물열차의 ‘대한독립만세’낙서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2년 6개월의 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하였으며, 다시 독립운동자금 문제로 투옥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중 1944년 6월 29일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했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절 마당 대각선 끝쪽에 나한전과 독성각, 칠성각 등이 한 무리를 지어 서 있는데, 태극기는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칠성각에서 발견되었다.

 

 

태극기 원본은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지 않아 칠성각 한쪽에 발견될 당시의 태극기의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한다. 실내가 어두워서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각별히 유의해서 보아야 한다.

 

6.25때 진관사의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는데, 칠성각은 독성각, 나한전과 더불어 화를 면했다. 만일 6.25때 불에 타버렸다면 ‘태극기’도 ‘독립신문’도 모두 함께 타 버렸을 것이다. 부처님의 은덕일까. ‘명당’의 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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